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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ia i autorzy | źródło tekstu - Wikipedia | Edycja

    스페인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스파냐 왕국에서 넘어옴)
    Reino de España
    스페인의 국기 스페인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Plus Ultra (보다 더 멀리)
    국가: 왕의 행진
    스페인의 위치
    수도 마드리드
    40°26′N, 3°42′W
    공용어 스페인어
    정부 형태 입헌 군주제
    후안 카를로스 1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건국
     • 레콩키스타

    1469년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504,030 km² (51위)
    1.04%
    인구
     • 2007년 어림
     • 2005년 조사
     • 인구 밀도
     
    45,200,737명 (28위)
    44,108,530명
    90명/km² (106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1조 290억 (9위)
    $26,320 (25위)
    HDI
     • 2005년 조사

    0.949 (13위)
    통화 유로1 (ISO 4217:EUR)
    시간대
     • 여름 시간
    CET (UTC+1)
    CEST (UTC+2) 
    ISO 3166-1  724
    ISO 3166-1 alpha-2  ES
    ISO 3166-1 alpha-3  ESP
    인터넷 도메인 .es
    국제 전화 +34
    11999년까지는 페세타

    스페인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 듣기 , 갈리시아어: Reino de España, 카탈루냐어: Regne d'Espanya, 바스크어: Espainiako Erresuma, 오크어: Regne d'Espanha, 문화어: 에스빠냐, 통용: 서반아(西班牙)) 또는 에스파냐 왕국유럽 서남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안도라프랑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에 마주한다. 유럽 연합에서 두 번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이다.

    스페인은 의원 내각제가 결합된 입헌 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유럽 연합에는 1986년에 가입하였으며, 2005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아홉 번째, 유럽 연합에서는 다섯 번째 규모의 경제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다.[1] 한때 멕시코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의 여러 나라와 필리핀, 적도 기니 등 세계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거느린 나라였다. 유럽에서는 상당히 경제 발전에 고전하고 내부 요인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목차

    [편집] 국호

    스페인 헌법에서는 국명을 에스파냐(España)로 쓰고 있으나[2],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정식 국명은 에스파냐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이다. 스페인영어식 국명이다.

    [편집]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역사입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재 정권이 물러난 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스페인이 새로운 경제와 문화의 부흥의 시기에 있다고 평가한다.

    [편집] 선사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알타미라 동굴 벽화 복제본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부족은 이베리아 족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마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테지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치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

    [편집]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히스파니아, 서고트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차 포에니 전쟁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3]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4]

    로마인은 타라고나(Tarraco)나 사라고사(Caesaraugusta), 발렌시아(Valentia), 레온("Legio Septima")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 포도주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이아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5]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편집] 이슬람 시대

    안달루시아에서 발견된 12세기 코란

    711년 이탈리크의 아랍인베르베르 족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남서부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거의 800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8세기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베르베르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오스트루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유대인은 “성지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며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여러 가지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딤미(Dhimmi)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6] 10세기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안달루스(알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7]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11세기까지 안달루시아는 세비야을 비롯한 그라나다, 말라가, 코르도바 등 작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이들은 외교와 전쟁을 번갈아 가며 생존해 나갔다.

    [편집] 무슬림 통치의 종말과 스페인의 통일

    레콩키스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이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 수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승리를 통해 기독교 왕국인 아스루티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8]

    한편 종래 800년간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Al-Andalus)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수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9]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10]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11]

    이사벨과 페르난도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과 카스티야와 이사벨라 1세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1478년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기독교 세력이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은 내 781년의 무슬림 지배는 종식되고 통일되기에 이른다.[12]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하여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추방하였다. 이를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라고 부른다.[13]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편집] 스페인의 전성기

    스페인 제국의 부를 상징했던 스페인 대범선

    네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14]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5년)으로 여러 고비를 겪었다.[15]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하게 된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6]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지나치게 강요하였으며 더구나 무적함대1580년대영국에 패배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적이 남발하면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17]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정치, 종교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와도 함께 연합하여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18]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19]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생겨났고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두 나라의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를 후일을 우려해 계승권을 포기했다. 스페인의 자주 독립은 펠리페 5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역을 합병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서 성취됐으며 그는 바로 귀족들의 터무니없는 특권을 폐지하였다.[20]

    통일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21]

    [편집] 스페인의 쇠퇴

    〈The Second of May 1808: The Charge of the Mamelukes〉 프란시스코 고야(1814년 작)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왕은 권력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이양하는 한편 조제프가 새로운 외국계 군주로 등극한다. 그는 스페인 군중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으므로 1808년 5월 2일 민족주의자 군중은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일종의 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이러한 움직임은 반도 전쟁으로 촉발됐으며 스페인에서는 이를 “독립 전쟁”으로 별칭하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낸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겹치면서 프랑스 세력은 1814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에 따라 나폴리의 왕으로 지내던 찰스 3세(나폴리의 페르디난드 7세)가 복권한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편집] 스페인-미국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스페인 전쟁입니다.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편집] 혼란한 근현대사

    20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족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1936년부터는 스페인 내전으로 사회 전체가 혼란에 휩싸인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부가 편중돼 있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보수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모로코에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공화파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소비에트 연방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헤밍웨이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 중 하나로 알려진 게르니카 폭격 사건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추축국에 협조하기도 했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학살, 비밀경찰을 통한 감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인권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산주의와 로마 가톨릭,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민족 해방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국제 연합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사회주의 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국제 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2004년경의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소피아 왕비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 왕정이 복고됐다.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결단으로 스페인에서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어, 국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화가 진행되었으며,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는 등 군부 독재자 프랑코 사후 스페인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반동분자의 군부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홧발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민주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스페인 정치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 동안 스페인 정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사회당은 1996년 결국 보수 우파에 정권을 내주고 만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유 민족 바스크”(ETA, “Basque Homeland and Freedom”)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편집]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22]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23]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알카에다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24] 그러나 5개월 후 검찰 당국은 이슬람 세력이 알카에다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스페인 총선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음을 밝혀냈다.[25]

    [편집] 경제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경제입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스페인의 경제 규모는 세계 8위이며, 유럽에서는 다섯 번째로 규모가 크다. 2007년 기준 국내 총생산(GDP)는 1조 438억 달러(월드 팩트북 기준)이며, 1인당 구매력 환산 지수(PPP)는 33,700달러(2007년)로서 이탈리아에 앞서며 33,800달러의 수치를 보인 프랑스일본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2007년 3.8%로 모든 G8개국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3년 연속 성장률 우위를 점했다.

    중도 우파 정부를 총괄하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는 1999년 유로화 도입을 성사시킴과 동시에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부흥기를 열었다. 2006년 10월 기준 실직률은 7.6%였으며, 이는 1990년대 초반 20%를 넘어섰던 것에 비해 엄청나게 양호하다. 그러나 계속된 인플레이션이 스페인 경제의 먹구름으로 남아 있다.[26] 또한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및 영국과 더불어 가장 교육 환경이 형편없다는 악평도 있어 우려를 사고 있다.[27]

    한편 스페인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럽 연합 국가의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8] 외국계 자본의 적극적인 투자와 더불어 유럽 국가 중 가장 역동적인 경제 발달 양상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29]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관광 산업은 지난 40년간 세계 2위 수준으로 발전해[30] 그 가치만 400억 유로에 달하며 전체 GDP의 5%를 차지할 정도로 기여도가 높다.[31]

    부동산 거품 현상은 스페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건설업 호황과 함께 전체 GDP의 16%, 구직자의 12%를 창출해 내고 있다.[32] 하지만 독일 신문지 디웰트에 따르면 2011년 스페인의 1인당 국민 소득은 독일에 따라잡힐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도 하다.[33] 스페인 내 가계 부채는 10년 만에 3배로 뛰어 올라 저소득층의 경우 소득 중 부채 비율이 125%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34]

    [편집] 정치 제도

    스페인은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양원제 국회를 갖추고 있으며, 입법부가 있어 분권 체제를 갖추고 있다. 국가 원수는 국왕이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상하원은 직접·간접 투표로써 선출된다. 상원의 경우 총 259석이며, 208석은 직접 선거로 나머지 51석은 각 지방 정부의 입법부가 천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임기는 4년이다. 행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두 명의 부통령이 보좌한다. 내각의 수반인 장관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총리

    가장 초기의 스페인 헌법은 18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1975년에 죽은 뒤 1977년에야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고, 1978년에는 헌법이 제정되는 등, 서유럽에서는 가장 늦게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17개의 자치주와 2개의 자치시가 서로 다른 자치권을 누리며 일종의 연방 국가(스페인어: Estado de las Autonomías)를 구성하고 있다. 스페인은 스위스독일, 벨기에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지방 자치가 잘 이뤄지고 있는 나라이다.[35][36][37][38] 카탈루냐 지방바스크에서는 별도의 경찰 조직이 치안을 맡고 있으며, 의회를 비롯한 행정, 예산, 보건 등 모든 정부 기관도 자치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2004년 4월 17일부로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가 취임했으며, 민주화 이후로 선출된 다섯 번째 총리가 됐다.

    [편집] 대외 관계

    프랑코 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스페인은 대외 정책에서 그동안 편향돼 있던 외교 정책을 재정비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1955년 국제 연합에 가입한 이후 줄곧 국제 사회로의 행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2006년 기준 분담금은 세계 9위권에 해당한다. [39] 여러 차례의 내전과 분열 이후 유럽을 시작하여 서방 세계와의 외교를 다지는 한편 198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으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다른 유럽 국가처럼 스페인에서도 유럽 연합(EU) 관련 외교 문제가 가장 핵심 사안으로 꼽히고 있으며, 서유럽에 관련한 사건에는 특히 관련국 혹은 유럽 연합 회원국과의 조율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200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스페인은 전 세계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계획을 완성한다.

    대한민국과는 1950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래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7년 기준 대(對)스페인 수출은 미국 달러로 약 39억 달러이며, 수입은 8.5억 달러이다. 지금까지 경기도를 비롯한 6개의 시도가 스페인 자치 정부와 자매결연하고 있다.[40]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고 있으며, 스페인계 혈통의 주민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히스패닉계 시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미국에서조차 널리 인식되고 있다. 스페인은 국가적으로도 히스패닉계와 언어와 무역, 역사, 문화에 대한 교류를 넓히고자 하며,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스페인은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발전한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편집] 영토 분쟁

    스페인은 영국령 지브롤터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6km2의 작은 해외 영토인 지브롤터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 영토로 현재 영국령이다. 지브롤터는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마이노르카 섬과 함께 영국에 편입된다. 마이노르카 섬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1802년 다시 스페인에 돌아왔다.

    지브롤터에 대한 영국 영유권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영국령이 됐으며, 이후로 스페인은 줄곧 지브롤터가 마땅히 스페인령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며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41]

    1940년 이후 스페인의 국제적 공세는 더욱 강화됐으나 정작 지브롤터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으며, 영국-스페인 공동 지배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42] 국제 연합은 영국과 스페인, 유럽 연합 회원국이 함께 지브롤터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모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세우타와 멜리야, 아프리카 북쪽의 지중해에 있는 플라사 데 소베라니아(스페인어: Plazas de soberanía)가 있다. 포르투갈과도 분쟁이 있어 국경 지대에 있는 도시인 올리벤사(Olivenza)의 경우 포르투갈에서 영유권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편집] 행정 구역

    스페인의 행정 구역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자치 지방, 스페인의 주입니다.

    스페인은 17개의 자치 지방으로 구성되며, 2개의 자치시인 세우타멜리야가 있다. 17개의 자치 지방은 50개의 주로 다시 나뉜다. 단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 칸타브리아 지방, 라리오하 지방, 마드리드 지방, 무르시아 지방, 나바라 지방은 그 자체가 주이자 자치 지방이다.

    행정상 스페인에는 50개의 주가 있다. 7개의 자치 지방—아스투리아스 지방발레아레스 제도, 칸타브리아 지방, 라리오하 지방, 마드리드, 무르시아, 나바라 지방—은 각각 하나의 주이다.

    [편집] 지리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지리입니다.
    과디아나 강 하구, 왼쪽은 포르투갈, 오른쪽은 스페인

    세계에서 51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면적은 50만 4,782㎢이다. 본토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는데, 그밖에 지중해대서양의 제도, 두 개의 자치시인 세우타멜리야가 있다. 본토의 1/3 정도가 산지이며, 평균 해발 고도 660미터로 유럽을 통틀어 스위스 다음가는 고산 국가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피레네 산맥, 대서양 연안 지방에는 칸타브리아 산맥, 남부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중앙부에는 메세타 고원(이베리아 고원)이 있다. 과달키비르 강, 과디아나 강을 비롯해 에브로 강, 두에로 강 등이 스페인의 주요 강이다.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포도오렌지, 올리브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의 지배를 오래 받아 아직도 아랍 문화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스페인 본토의 동쪽을 보면 큰 섬이 몇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요르카 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라 불리는 이곳은 지중해에서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이며, 1950년대 스페인 정부의 관광 개발 정책에 힘입어 관광업이 계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장했다. 세우타와 멜리야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와 인접하는 한편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 항구인 지브롤터는 영국령이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안도라 공국과 접하고 있다. 또한 피레네 근처에 있는 인구 약 1200명 규모의 이비아(Llívia)라는 마을은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편집] 기후

    스페인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자면 기후 또한 다양하게 나뉜다. 대개 스페인의 기후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 지중해성 기후는 안달루시아 평원 해안가에서 시작해서 바르셀로나와 피레네 산맥 인근까지 해안 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 대륙성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과 혼재하여 나타나는 기후 특성으로 특히 마드리드를 비롯한 내륙에 나타난다.
    • 서안 해양성 기후는 갈리시아를 비롯해 비스케이 만 근처의 해안가에 나타난다. 가장 큰 도시인 빌바오를 포함한 이 지역을 대개 “녹색의 스페인”(Green Spain)이라고 부른다.
    • 사하라 사막이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뜨거운 바람이 넘어오는데, 이 때문에 남부 지방은 상당히 건조한 기후를 띠기도 한다. 빌바오 지역을 제외한 중남부 일부에서는 반사막(半沙漠) 지대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하라 사막의 바람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편집] 언어

    스페인의 언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 공용어      바스크어, 공용어      갈리시아어, 공용어      아란어, 공용어(오크어 방언)      아라곤어, 비공용      아스투리아스레온어, 비공용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언어입니다.

    스페인 영내에서는 스페인어공용어이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와 함께 그 지방의 언어를 공용어로 삼기도 한다. 비록 공용어의 지위를 갖지는 못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이베리아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아스투리아스레온어, 에스트레마두라어, 아라곤어 등 일부 언어가 살아남아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아스투리아스레온어는 공용어가 아니지만, 아스투리아스 지방 정부는 주민들에게 아스투리아스어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지역 내에서 공용어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라곤어의 경우에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 공용어가 아닌 언어의 경우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습득된 언어이기는 하지만 언어 사용자의 의식적인 노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하면 그만큼 언어 사용의 수요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의 멜리야에서는 아라곤어 사용자가 다수 분포한다.

    지중해 연안의 관광지에서는 영어독일어가 널리 쓰이며 여행객을 위해 관광업계 종사자와 지역 주민은 대개 제2외국어로서 이들 언어를 배운다.

    [편집] 주민

    스페인의 인구분포도

    스페인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아랍인프랑스인포르투갈인도 있다.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영향이 있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성씨는 가르시아이다. 남부 스페인 사람은 정열적이고 밝다고 알려진 스페인 사람의 특징이 잘 나타나지만, 북부 스페인 사람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 않다.

    2004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은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동성 결혼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다. 설문자의 66%가 동성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43] 실제로 2005년 6월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이 187표 중 147표로 가결됐으며, 결국 스페인은 유럽에서 벨기에네덜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동성 결혼을 허용한 나라가 되었다.

    20세기 동안 스페인의 인구 구조와 인구 증가